믿음과 시인, 구원의 확신에 대한 고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사도행전 2 22절에서 베드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라고 밝혔다. 하지만 위에 마태복음 구절에서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구원의 요소가 아닌 것처럼 기록돼 있다. 그렇다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외에 구원을 받는 다른 방법이 있는 또한 아니다. 로마서 3 28절에는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명시돼 있다. 이어 로마서 10 10절에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적혀 있다. 믿음(belief) 시인(confession) 하나이다.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을 진리(truth)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무엇인가를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을 시인 혹은 주장(assert) 성향(disposition)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무엇인가를 시인 혹은 진심으로 주장한다는 것은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믿는다는 말이다. 이처럼 시인 없는 믿음, 믿음 없는 시인은 없다. 그렇다면 시인 혹은 표현 가능성이 있는 믿음이 구원의 우선 요소인 것이며, 믿음을 바탕으로 삼지 않은 행위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7:21-23 의미는 무엇일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구원을 얻는 길인 것일까 아닌 것일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행위가 구원의 우선 요소인 것일까 아닌 것일까? 만약 사도행전과 로마서에서 말한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 시인하는 것이 믿음의 부분으로서 구원의 우선 요소라면, 마태복음 구절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될 있다.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신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부르고 있는 상대가, 내가 믿고 있는 대상이 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자면, 내게 사과로 보이는 사물을 가리키며 사과라는 단어를 소리 내어 지칭한다 하여도, 내가 실제로 지칭하고 있는 것이 사과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일이 실제로 사과가 아닌 배라면, 내가 아무리 사과라 믿고 먹었다 하더라도, 나의 행위 사과를 먹은 행위가 아닌 것이다.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고 신의 뜻을 행하고 있다고 믿고 행동한다 한들, 실제적으로 나의 믿음의 대상, 내가 부른 이름의 지시체가 신이 아니라면 나는 사실상 구원을 받지 않은 것이다.

같은 해석에 따른 위에 구절의 심각성은 구원의 여부 사실을 개인이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감각(sense)부터 사고(reason)까지 인간이 가진 모든 기능을 총동원한다고 해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없다는 것이다. 같은 인식론적 불확실성은 다음과 같은 회의론을 고려해보면 명확해 진다. 데카르트(Descartes) 사악한 악마(evil demon)”라는 사고 실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회의론을 제시했다. 전능하지만 사악한 초자연적인 존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사악한 악마는 단순한 경험부터 수학적 지식까지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속일 있다.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내가 무엇인가에 대해 아무리 확신을 가져도, 그것은 내가 가진 확신이라는 느낌에 불과하며 느낌은 틀릴 있기 때문이다. 사악한 악마는 나에게 거짓된 정보를 알려준 , 확신의 느낌을 주입할 있다. 데카르트는 무한의 유형으로서 전선(omnibenevolence) 신의 특성이라는 근거로 같은 회의론을 무마하려 했지만 이는 실패한 철학적 시도로 받아들여 진다. 로크(Locke) (Hume) 등의 경험주의자(empiricist)들은 감각 혹은 경험을 지식의 정초로 세우려 했지만, 경험에는 지식의 요소인 필연성(necessity) 결여돼 있으므로 데카르트의 회의론과는 별개로 귀납의 문제(problem of induction)”라는 다른 종류의 회의론을 제시하게 됐다. 귀납의 문제에 따르면 단순 경험은 오늘 먹은 빵이 내게 영양분을 공급했다고 해서, 내일 먹게 또한 그럴 것이라는 필연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칸트(Kant) 경험의 필연성 결여 문제를 인간은 감각 정보를 지성의 범주(Categorie) 따라 분류한다는 분석을 바탕으로 인지 구조는 규범성을 뛴다는 논점을 통해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인간이 인지 불가한 관념 밖의 물자체(noumenon)”라는 영역을 상정해야만 했다. 프레게(Frege) 러셀(Russell), 전기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철학을 바탕으로 카르납(Carnap) 등의 논리실증주의자(Logical Positivist)들은 1 논리(first-order logic) 감각소여(sense data)”라는 개념을 통해 경험주의적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으나, 셀라스(Sellars) 콰인(Quine) 등의 현대 철학자들이 소여의 신화(Myth of Given)” 번역 불확정성(indeterminacy of translation)” 등의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면서 여전히 철학적 난제로 남았다. 수학계에서는 힐베르트(Hilbert) 중심으로 수학의 무모순성을 증명해 지식의 정초를 성립하려 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괴델(Gödel)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s) 인해 무산됐다. 이로써 지식의 정초 부재, 믿음에 대한 절대적 확신(infallible certainty)이 없다는 것이 현대 철학의 견해이다.

그렇다면 의미론은 어떠 한가? 러셀과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고유명사(proper name) 의미를 명사와 결부된 서술들, 확정기술구(definite descriptions) 혹은 가족기술구(family descriptions) 동일시 했다. ,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1913 캘리포니아 주에서 태어난 36 대통령 같은 서술의 줄임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크립키(Kripke) 양상 논리(modal logic) 토대로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의미론을 반박했다. '닉슨'이라는 이름이 단순히 연관된 서술의 줄임말이라면 닉슨이 36 대통령에 당선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라는 양상 명제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크립키는 고유명사는 서술과 상관없이 고정지시어(rigid designator)로서 해당 물체를 지시하고 있고, 고유명사와 지시체의 지시 관계는 인과관계라는 인과적 지칭 이론(causal theory of reference) 제시했다. 퍼트넘(Putnam) 쌍둥이 지구(twin earth)” 사고 실험을 통해 인과적 지칭 이론을 일반 명사에도 적용했다. 물론 크립키의 인과적 지칭 이론은 위에 말한 인식론적 회의론에서 자유롭지 않다. 귀납의 문제로 인해 인과 관계 자체에 대한 불확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퍼트넘은 인과적 지칭 이론을 버리고 내재론(internalism) 택했었지만, 내재론은 일종의 언어철학적 관념론으로서 어떤 문장이던 어떻게든 참으로 해석될 있다는 퍼트넘의 역설(Putnam’s Paradox)” 취약하다는 문제가 있다. 크립키와 플란팅가(Plantinga) 등의 대용론(ersatzism) 양상 논리 해석의 대안으로 데이빗 루이스(David Lewis) 양상 실재론(modal realism) 바탕으로 확정기술구 이론이 있지만, 루이스의 양상 실재론은 관념 혹은 물체간 내재적인 필연성이 없다는 흄의 형이상학을 상정하기 때문에 브랜덤(Brandom) 제시한 개리맨더링 문제(gerrymandering problem)” 취약하다. 루이스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연적 속성(natural properties)”이라는 개념을 제안했지만, 과연 연적 속성이 어떻게 셀라스의 소여의 신화 범하지 않고 인신론적 정초를 마련해줄지는 미지수이다.

같은 철학적 논고들을 살펴볼 , 내가 주의 이름을 시인할 , 내가 신을 믿고 있다고 생각할 , 나의 행위가 올바른 믿음에 기초돼 있다고 여길 , 내가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믿을 , 나의 정체성을 기독교인으로 삼을때 이를 보장해 있는 근거는 전무하다. 일부 신학자들은 적어도 구원의 확신에 대한 인식론적 정초만은 계시(revelation)에서 찾으려 하겠지만, 계시마저도 위에 말한 철학적 회의론을 극복하지 못한다. 계시 또한 직관의 부류로서 경험과 사고의 불확실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랜덤과 크리스핀 라이트(Crispin Wright) 등의 철학자들은 언어의 의미는 사회적으로 통용됨에 있다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영감을 얻어 지식의 정초를 사회성에서 찾는다. 하지만 같은 사회적 의미론(social theory of meaning) 따르면 어떤 단어의 의미란 특정 집단의 언어게임(language game) 불과한 것이다. (브랜덤은 추론주의(inferentialism) 통해 사회적 의미론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으나, 필자는 이에 대한 맥도웰(McDowell) 회의감에 동의하는 편이다.) 기독교에서 원하는 시인의 효력이 그저 언어게임에 불과할 리는 없다.

여기서 얻어야 하는 교훈은 무엇일까? 필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뱉는 단어가 실제로 주의 이름인지, 나의 믿음이 실제로 신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 나의 행위가 올바른 믿음에 기초돼 있는 것인지,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인지, 나의 정체성이 과연 기독교인인 것인지, 같은 신학적 사실 여부에 대한 판단권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 주님의 다시 오심 심판대 앞에 섰을 , 내가 했던 모든 말과 행동, 생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재판관이다. 브랜덤과 루이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내가 아닌 득점 기록원(scorekeeper)” 결정하는 사안이다. 날이 때까지 내가 시인하는 모든 것은 해석되지 않은 잡음(noise)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가 내는 잡음 중에 단순 잡음으로써 의미를 지니는 것이 있다. 바로 고통을 표현하는 신음 소리이다. 아플 외치는 소리는 인식론적 회의론에서 자유롭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던 것처럼 아픔에는 이라는 개념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안다라는 말은 모순어법이다. “아파!”라는 소리침은 자체로 의미가 있다. 잡음은 무엇인가를 지시할 필요도 없다. 개별(token) 표현으로 자극에 대한 반응을 뜻하며, 언어의 가장 원시적 기본 단위이기 때문이다. 나는 왜 시인하는가? 무의미할 수도 있는 소리를 어찌하여 끊임없이 내는가? 그것은 어둠 속의 절규이자 불확실성의 징후이다. 한낱 필멸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고백이다. 내가 뱉는 모든 기도와 고해는 고통에 못이긴 신음 소리이다. 순간이 고통이므로 나는 쉬지 않고 기도한다. (데살로니가 전서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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