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납의 문제(The Problem of Induction)
추론(inference)에는 크게 두가지 유형이 있다. 논리학과 수학에서 쓰이는 연역법(deduction)과 자연/사회 과학과 경험에 의거한 실생활에서 쓰이는 귀납법(induction)이 그 두가지이다. 연역법은 모든 전제가 참(true)일시 결론 또한 필연적으로 참이며, 귀납법은 모든 전제 참일시 결론 또한 참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이같은 차이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연역법과 귀납법의 전개 체계에서 엿볼 수 있다. 연역법은 보통 공리(axiom)라는 보편적 진술에서 개별 사례로 귀결되기 때문에 전제로부터 결론의 진리값 전도율이 절대적이다. 이에 비해 귀납법은 개별적 진술에서 보편 사례로 귀결되기 때문에 진리값 전도율이 개별적 진술의 자료량에 의해 조건적이다. 물론 이같은 전반적인 전개 체계에 들어 맞지 않는 귀납법(예, 귀추법)도 있지만 전제의 참이 결론의 참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이 공통분모이다.
전통적인 지식론인 JTB 이론은 ‘지식’을 ‘정당화된 참된 믿음(justified true belief)’으로 정의한다. JTB 이론에 따르면 어떤 개체가 지식이 되려면 세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첫번째 조건은 ‘믿음’이라는 심리적 상태, 두번째 조건은 참된 믿음, 세번째 조건은 정당화된 믿음이어야 한다. 첫번째 조건은 “S가 ‘P’를 안다”는 것은 “‘P’는 참이다”라는 것을 내포한다는 (어찌보면 자명한) 원칙에서 파생된다. ‘참’과 ‘거짓’, 즉 진리값은 명제(proposition)의 속성이다. 그렇다면 지식은 참된 명제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특정 명제의 사실 여부를 사유하고 이에 대해 입증 책임을 질 수 있는 (심리적) 상태를 갖추는 것이 필수조건이 되게 되는데, 이같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상태가 ‘믿음’이라는 명제 태도(propositional attitude)이다. “S가 ‘P’를 믿는다”라는 것은 S는 ‘P’를 참이라 여기고 있고, 이를 입증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두번째 조건은 믿음이 단순히 특정 명제를 참으로 여기는 것을 넘어서 참된 명제에 대한 것이 되어야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지식의 특성에서 파생된다. 지식과 달리 믿음은 틀릴 수 있기 때문에 입증 책임을 지는 것이다. 지식은 참을 내포하고 있고, 믿음은 거짓될 수 있기 때문에 참된 믿음만이 지식이 될 수 있다. 세번째 조건은 우연적으로 참된 믿음을 걸러내기 위함이다. 지식은 단순히 참된 명제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대상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연적으로 참된 명제를 맞춘다면 지속가능한 신뢰성이 결여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7,200개의 언어가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해보자. 혹자가 뜬금없이 이 명제를 말했다고 해서 그가 이 사실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어떠한 증거와 추론 혹은 방법으로 이 같은 사실을 믿게 되었는지에 따라 지식인지 요행수인지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해 JTP 이론은 ‘참된 믿음’과 더불어 지식을 구성하는 조건을 ‘정당화’로 정의한다. 믿음의 정당성은 추론을 통해 특정 명제에 대한 믿음이 참인 것에 대해 근거를 제시하는 것, 즉 증명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이는 추론이 당사자가 어떠한 전제를 바탕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해당 믿음을 얻게 됐는지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과 추론의 관계를 위와 같이 정리하면 몇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이중 귀납 추론에 의거한 믿음이 과연 지식의 자격을 갖출 정도로 정당성을 갖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귀납의 문제’이다. 앞서 말했듯이 귀납법은 결론의 참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는 개별자에서 보편자로 귀결하는 일반화나 관찰된 현상에 대한 최선의 설명으로서 가설을 채택하는 귀추법 등 확률성을 띄는 귀납법의 특성에서 비롯된다. 결론이 필연적으로 참이 아니라는 것은 해당 결론에 대한 믿음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귀납법에 의거해 결론에 대한 믿음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는 원칙적으로 불확실성이 내포돼 있다는 것이다. “A라는 바이러스가 B라는 질병을 유발한다”라는 주장은 수많은 임상 실험을 통해 입증된다. 하지만 이 주장이 아무리 확률적으로 참에 가까워 질지라도 실험의 오차 범위는 존재한다. 이는 해당 주장이 축적된 개별 사례를 통계적으로 일반화한 명제로서 앞으로 어떠한 현상이 관찰되어 반증될지까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해당 주장이 귀납법이 아닌 연역법으로 귀결된 결론이라 하더라도 전제가 되는 명제는 귀납법으로 추론되었을 것이며, 해당 명제 또한 연역법으로 귀결되었다 하더라도 무한 후퇴(infinite regress)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귀납법으로 귀속될 수 밖에 없다. 이는 결론의 참을 보장해 주는 보편적 진술이 경험을 통해 자연상태에서 관찰될 수 없고 오직 ‘유클리드 기하학’과 같은 특정 형식 체계에서 상정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과 경험적 통찰을 지탱하는 인과론(causation)과 균일성(uniformitarianism) 등의 보편적 진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철학자 흄(Hume)은 다음과 같은 사고 실험을 제시했다. 당구공 A가 당구공 B를 쳐서 움직이게 한 것을 관찰했을때, 다음번에도 A가 B를 움직이게 할 것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무엇인가? 어떤 현상이 한번 일어났다고 그 다음에도 동일하게 일어나야할 이유는 없다. 특히 A와 B 사이에는 어떠한 논리적 관계도 형성되어 있지 않다. 혹자는 A와 B 사이의 인과 관계로 인해 다음번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인과 관계’가 과연 무엇인가? 현상에서 관찰된 것은 A가 B 근처로 굴러 갔고, B 앞에 섰을 때, B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만약에 이것이 ‘인과 관계’라면 다음에도 같은 관계성을 보여야할 이유가 있는가? 만약 같은 현상이 1,000번 관찰되었다 하더라도 1,001번째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날 확률이 과연 100%인가? 축적된 자료를 토대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는 예측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예상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일부 합리주의자(rationalist)들은 인과 관계에 필연성(necessity)를 부여하여 해결하려고 했다. 만약 축적된 자료를 전제로 미래에 대한 예측이 필연적으로 참이라면, 즉 A와 B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면 예상치 못한 반증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필연성은 논리학과 수학의 영역이지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과학은 자연에서 관찰되는 개별 사례로부터 보편적인 원칙을 도출해 낸다. 따라서 보편자에서 개별자로 귀결하는 필연적 추론법이 원천봉쇄된 것이다. 귀납의 문제를 쉽게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이전까지 관찰된 바로는 A가 B를 움직이게 했다”와 “앞으로 관찰될 바로도 A가 B를 움직이게 할 것이다”라는 명제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성도 없으므로 귀납 추론을 통해 증명된 믿음에는 원칙적으로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지식의 필수 조건은 ‘정당화된 참된 믿음’임으로 귀납법에 의거한 믿음이 참된 믿음으로 정당성을 갖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귀납의 문제에 대한 흄의 해결방안은 다음과 같다. 인과 관계란 같은 현상이 반복적으로 관찰될 때 습득하게 되는 일종의 습관, 즉 관습(custom)이다. 귀납법이란 바로 (심리적) 관습을 습득하는 추론 방법이다. 귀납법을 통해 얻게 되는 결론은 연역법을 통해 얻게 되는 결론과는 성질이 다른 것이다. 이는 귀납법과 연역법이 각자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며, 이에 따라 정당성에 대한 귀납법과 연역법의 기준 또한 다를 수 밖에 없다. 즉, 특정 결론을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증명 조건이 귀납법과 연역법은 다른 것이다. 따라서 귀납의 문제란 서로 다른 추론법의 증명 조건을 연역법이란 한 종류의 증명 조건으로 환원하려는 논리적 오류, 각 추론법에서 ‘지식’으로 인정하는 조건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함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애초에 ‘참’과 ‘정당성’이라는 조건은 서로 다른 범주이다. 정당화란 특정 믿음이 참인지를 가릴 수 있는 장치인 것이지, 정당성 자체가 참은 아니다. 정당성 없는 믿음이 (우연적으로) 참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거짓된 믿음이 정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참과 정당성에 거리가 있다는 사실은 '게티어 문제(Gettier Problem)'을 통해 입증되었다.) 평소에 옷 색깔을 잘 맞추는 디자이너가 자신도 모르게 인공조명을 사용한 공간 안에 있게 되어 옷 색깔을 틀리게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디자이너는 평소에 하던대로 옷 색깔을 맞췄기 때문에 그것이 틀린 답이라 하더라도 당사자의 실수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만약 평소대로 자연조명 아래에서 옷 색깔을 봤다면 옳은 답을 말했을 것이고, 이는 참과 정당성을 모두 지녔기 때문에 (당사자는 자신이 인공조명 아래 있지 않다는 확률을 제거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지식이 될 수 있다. 이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지식의 조건인 ‘참’과 ‘정당성’의 일부가 인식주체(cognitive agent)의 심리 상태의 외부 조건(예, 자연조명 등)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당 외부 조건이 속해 있는 자연 현상에 관한 추론 방법인 귀납법에서 참과 거짓을 가리는 증명 조건은 상정된 공리와 규율 안에서 추론하는 연역법의 증명 조건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같은 차이점을 간과한다면 귀납적 지식이 불가능하다는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론(Academic skepticism)에 동조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위와 같이 귀납의 문제는 귀납법과 연역법의 증명 조건, 귀납적 지식과 연역적 지식의 필수 조건의 차이점을 이해함으로 해결된다. 하지만 철학자 넬슨 굿맨(Nelson Goodman)은 새로운 귀납의 문제(new riddle of induction)를 제시했다. 귀납법과 연역법이 구분되어 진다 하더라도 귀납법에는 여전히 옳은 일반화와 그른 일반화를 구분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신장 차이와 소득 수준 사이에 지속적인 연관성이 관찰된다고 해서 두 항목 관계에 인과성을 부여할 수 없다. 오히려 섣부른 인과성 부여는 해당 연관성의 원인이 되는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시키지 못하고 긍정하게 되는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일반화 종류의) 귀납법이 반복된 관찰을 통해 개별자에서 보편자로 귀결하는 습관을 습득하는 방법이라면 옳은 습관과 그른 습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과연 어떠한 습관이 사실 혹은 자연의 법칙에 의거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단순히 과거의 관찰이 근거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반복된 관찰을 통해 “에메랄드는 초록색(green)이다”라는 일반화를 했다고 가정해 보자. 문제는 이 결론의 근거가 되는 같은 자료로 “에메랄드는 그루색(blue)이다”라는 일반화 또한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루색’이란 특정 시간 전에는 초록색, 후에는 파란색으로 관찰되는 색깔이다.) 현재까지 모든 에메랄드가 초록색이었기 때문에 모든 에메랄드는 초록색이며 앞으로 발견될 에메랄드 또한 초록색일 것이라고 결론 지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현재까지 모든 에메랄드가 초록색이었기 때문에 모든 에메랄드는 그루색이며 앞으로 발견될 에메랄드는 파란색일 것이라고 결론 지을 수도 있다. 이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며, 같은 자료를 가지고 오직 초록 암석만을 같은 종류로 분류할 것인지, 보통 사파이어라고 부르는 푸른 암석과 에메랄드라고 부르는 초록 암석을 발견된 시간에 따라 같은 종류로 분류할 것인지 정하여 자연과 우주를 어떻게 나누고 이해할 것이며 이에 따라 어떠한 행동 양식을 취할 것인지 결정하는 행위이다. 혹자는 생존에 유리한 분류법이 진리에 가깝지 않겠냐고 반문하겠지만, 진리가 생존에 기여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예를 들어 뉴턴의 역학이 미시적, 거시적 자연의 법칙은 아니지만 로켓을 우주로 발사할 때 우주 비행사들의 생존을 보장하기에는 충분하다. 새로운 귀납의 문제는 귀납법과 연역법의 차이점을 인정하지만, 그 차이점에서 오는 귀납의 문제점을 보다 더 날카롭게 드러낸다. 귀납법은 표면적으로 개별적 진술에서 보편 사례로 귀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어떠한 보편 사례로 귀결되는지에 따라 개별적 진술이 뒤바뀐다. 또한 각 보편 사례의 정당성이 개별적 진술에 근거하기 때문에 어떠한 개별적 진술이, 어떠한 일반화가, 어떠한 경험적 통찰이, 어떠한 관찰적 습관이 올바른지 측정할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철학에 교양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위에 말한 흄과 굿맨의 귀납의 문제가 다음과 같은 철학적 난제들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 토마스 쿤(Thomas Kuhn)의 과학 패러다임론에서 발생하는 ‘통약 불가능성 문제(incommensurability problem)’
- W. V. O. 콰인(Quine)의 분석명제(analytic proposition)와 종합명제(synthetic proposition)의 구분에 대한 논박에서 발생하는 ‘번역 불확정성 논제(indeterminacy of translation)’
- 솔 크립키(Saul Kripke)의 기질주의적(dispositionalist) 의미론에 대한 비판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역설(paradox of meaning)’
- 힐러리 퍼트넘(Hilary Putnam)의 내재적 실제론(internal realism)에서 발생하는 ‘퍼트넘의 역설(Putnam’s paradox)'
또한 명제와 추론에 대한 역설로서 귀납의 문제는 좁게는 윌프리드 셀라스(Wilfrid Sellars)의 ‘소여의 신화(Myth of the Given)’에 대한 비판, 넓게는 쿠르트 괴델(Kurt Gödel)의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와도 연관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철학적 난제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필자는 정당성, 필연성, 실제성 등과 같은 규범성을 띄는 개념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메타윤리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자연을 바라볼 때 자연 그대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칸트(Kant)가 밝혔듯이 인간의 인지구조는 외부로부터 오는 감각 자극을 인과, 존재, 속성 등 범주(Categories)에 따라 분류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인간은 규칙에 따라 인지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인문학으로서의 철학의 중심 문제는 이원론(dualism)의 문제로도 표현되는 심신(心身) 관계, 규범적 사고체계를 가진 인간의 시각과 개별 사실들의 집합체인 자연 세계의 관계를 과연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에 있다. 이는 더나아가 과연 ‘규칙성’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고 더욱더 인간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자연 속 패턴을 읽고 어떤 반응이 옳은가 사유할 수 있는 이성(rationality)이라는 능력이다. 이성이 세계속 자신의 위치를 사유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역설과 난제들이 발생한다. 귀납의 문제는 그 중 일부이다. 그리고 이 모든 난제들의 핵심 주제는 이성, 즉 인지구조를 구축하고 있는 규범성, 규칙성에 대한 이해이다. 규칙성에 대한 사유, 끝없는 자기반성이라는 철학적, 실존주의적 고뇌를 시각에 따라 프로메테우스의 저주 혹은 원죄의 저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진리를 추상하며 사유와 회개, 용서, 거듭남이라는 규범의 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쥐어 준 신의 은혜라고 말하고 싶다. 이 철학적 고뇌야 말로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의미,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영(πνεῦμα)’에 속한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창 1:27; 고후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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