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이 글은 2026년 8월 14일부터 16일까지 캘리포니아주 밀피타스(Milpitas)시 뉴비전교회(New Vision Church)가 주최한 디모데 수련회(Timothy Worship Camp)에서 노진준 목사가 전한 네 편의 설교 내용을 기반으로 정리한 나의 해석 및 생각이다. 각 설교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형통이란 무엇인가? (창37:5-11)
여호와가 요셉에게 보이신 형통은 요셉이 애굽에서 고난 끝에 총리가 된 세상적인 성공과는 무관하다. 성경은 요셉이 성공할 때가 아닌 그가 보디발에게 팔려갈 때와 누명을 쓰고 투옥될 때 등 고난을 당할 때 형통이 있다고 기록했다. 요셉이 청소년 시절 꾸었던 꿈들의 의미는 단순히 그가 권력을 쥐어 모두 위에 군림할 것이라는 것보다는 애굽 총리가 되어가는 그의 여정이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들이 애굽에서 400년 종 노릇을 한 후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언약(창15)을 이행하는 과정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셉의 형통은 이 언약이 이행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과 주관하심이 드러나는 것임으로 요셉의 인내와 성공 자체와는 무관하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신29:29)
하나님의 뜻 혹은 계획은 이미 나타난 것과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나뉘어 진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은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뜻으로 아직 우리에게 보여지지 않았다. 이에 반해 나타난 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으로 우리에게 보여졌지만 이 계시를 통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한 예측을 할 수는 없다.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하는 욕구의 기저에는 스스로의 삶에 대한 애착, 미래를 대비하여 보다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이 협력하여 이뤄지는 ‘선’(롬8:28)에 대한 나의 개념이 하나님의 것과는 다를 수 있다. 이러한 문맥에서 기도를 미래에 대한 확신을 얻는 것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에게 털어놓는 과정을 통해 관계성을 유지하는 행위로 봐야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을까? (요18:33-38a)
예수는 빌라도에게 재판받는 자리, 즉 가장 무력한 순간에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자신의 왕 되심)을 선언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이 세상의 성공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의 성공 기준은 비교를 토대로 한다. 비교에는 도태가 있으며 누군가는 배제된다. 하나님의 기준은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통해 남과 비교해 얼마나 더 많은 성과를 내었는가에 있지 않다. 만약 성과가 기준이라면 공평하지 않은 능력 분배 위에 누군가는 도태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주권은 공의스럽지 않다. 은사를 설명하면서 사랑을 강조한 고린도전서 13장을 비추어 볼때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능력 분배 및 성공 기준은 주어진 은사로 얼마나 사랑을 실천하는가에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이 같은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고난의 길 (엡3:1-9)
만약 겸손과 고난이 의도적이던 의도적이지 않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에 기여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의 권익 신장 및 생활 양식 영위, 즉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는 것(자기 PR)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과연 고난의 목적이 이와 같다면 이는 결국 다른이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며 하나님의 주권의 공의와 양립할 수 없다. 마태복음 16장과 마가복음 6장에서 예수가 베드로를 꾸짖은 사건은 이같은 문맥에서 이해될 수 있다. 베드로는 자신이 따르는 예수의 지위가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통해 일종의 기복신앙적인 보상을 바랬으나 예수는 이같은 생각을 ‘사람의 일’이라고 칭하고 베드로를 사탄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려한다고 꾸짖었다. 진정으로 고난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겸손해지는 것은 삶에서 결정을 내리는 동기가 부유함과 편리함 등에 있지 않고 결과가 어떻든간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을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자’로 표현하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소개한 것에는 바로 이와 같은 정신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올바른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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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저 성경적 문맥에서의 ‘형통’이라는 개념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 39장에서 형통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Immanuel)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실때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다. 허락(permit)에는 두가지 이해가 가능하다. 첫째로 허락된 일이 굳이 일어날 필요는 없지만 딱히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제한 또한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극적인 이해이다. 이같은 이해 속에서 특정 사건의 발단은 하나님이 아닌 개인의 의지에 있다. 둘째로 일어날 일이 최종 목적 달성에 필연적으로 기여함으로 그 일이 일어나는 방향으로 의도적으로 조치가 취해졌다는 적극적인 이해이다. 따라서 특정 사건의 발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있다. 소극적인 이해는 종종 하나님의 주권하에 고난과 악행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한 변증적인 설명에 사용되고는 한다. 이 설명에 따르면 고난과 악행이 일어나는 원인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닌 허락된 여러 가능성들 중 각 개인이 의지에 따라 선택한 것에 있다. 즉, 고난과 악행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무관하며 그에 따른 개인의 고통과 책임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설명은 신의 전지전능전선성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선택과 책임에 대해 신과 인간은 비대칭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신은 본질적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알고 있으며 이에 대처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 반해 유한한 인간은 현재의 선택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다. 또한 인간은 자신이 현재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원인이 되는 기질(disposition)을 형성하는 과거(환경, 유전자 등)을 통제할 수 없다.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에게 유일하게 정당한 ‘책임’은 예측과 오차를 통한 학습 그리고 이를 통해 속한 집단의 생존 및 균형 유지에 유리한 기여 개체로 길들여질 수 있는 혹은 이러한 교화가 실용적으로 불가하다면 제거 및 격리되는 미래지향적(forward-looking) 책임이다. 이같은 윤리개념적 틀에서 고난(충격요법으로서의 제재)는 실증적으로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세속적인 정의는 이같은 틀을 기반으로 삼는다. 문제는 신은 개인과 관련해 과거가 어떤 기질을 형성할지 그리고 이 기질이 어떤 미래를 초래할지 이미 알고 있으며 이를 미리 대처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신성의 입장에서 볼때 교화 및 제거 혹은 격리에 필요한 제재는 매우 불필요한 과정이며 이로 발생하는 고난은 미래지향적인 목적 없이 단순히 고통 그 자체만을 발생시키기 위한 고난이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한 존재는 아주 간단하게 고통이 일어날 상황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목적없는 소극적 허락하 고난은 철저히 고통 그 자체만을 위한 것이다. 고난과 악행을 소극적으로 허락함은 목적없는 고난을 발생시키고 방관하는 것이다. 만약 이같은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그는 동시에 전선할 수 없으며 그러한 존재가 우리를 단순 지배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그의 권위를 인정할 의무는 없는 것이다. 만약 기독교의 신이 이와 같은 존재라면 우리가 그의 주권을 인정하고 따라야할 이유는 전무하다, 아니 절대적으로 부인하고 거역해야 할 것이다. 신에게는 소극적 허락과 적극적 허락의 구분이 없다. 고난에 대한 소극적인 허락을 하는 전선은 전지전능할 수 없다. 따라서 절대자로서 하나님의 허락은 소극적인 허락이 아닌 적극적인 허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각주: 인간에게 자유론적 자유의지(libertarian freewill)를 부여하는 악의 문제(problem of evil)에 대한 변증적 시도는 어떠한가? 물론 인간에게 실제적으로 해당 종류의 자유의지가 있다면 과거지향적(backward-looking) 책임을 성공적으로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유한성을 전제하에 이 책임의 물음이 신의 전선과는 양립할 수 없다. 유한한 존재이면서 자유론적 자유의지가 있다면 신은 고난을 방관함과 동시에 고난에 대한 모든 기본응분적(basic desert)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세속적 자유론적 자유의지는 메타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신의 전선과 병행될 때 논리가 맞지 않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론적 자유의지가 있고 신이 존재하지 않거나 있다면 전선하지 않고 신이 전선하고 인간에게 자유론적 자유의지가 없던지 둘 중 하나이다.)
고통과 행복을 포함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허락하신 일이라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전지전능전선한 존재가 도대체 왜 고난을 허락한 것인가? 적극적인 허락하의 고난에는 그것을 허락한 존재의 의도가 묻어있다. 즉, 그 고난에는 목적성이 있으며 의도된 목적에 그 고난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같은 존재의 본성에 대해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로 고난을 적극적으로 허락한 존재가 전지전능하다면 동시에 전선할 수 없다. 이같은 존재는 폭군이며 그의 권위에는 정당성이 없다. 둘째로 해당 존재가 전지전능전선하다면 해당 고난이 필수불가결한 목적을 포함한 세계가 모든 가능세계(possible world) 중 가장 선하고 완벽한 세계이며, 이 존재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인 선과 악에 대한 그의 판단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누군가는 장애 혹은 지병을 앓고 또 누군가는 전쟁의 참혹함을 겪으며 또다른 누군가는 사회 혹은 환경, 유전적 요인으로 인해 가난에 찌든 것이 가장 선하고 완벽한 세상일 수가 있는가? 어떻게 이러한 삶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모든 것이 형통하다 할 수 있는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연 끝이 어떠한 형태로든 좋을 것이라고 소망을 갖지 않은 상태로 살아갈 수 있는가? 지금 겪는 이 고통이 학습적으로 아무 의미 없는 그저 고통만을 위한 고통이라고 믿고 나아갈 수 있는가? 앞으로 같은 고통은 피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한다거나 피할 수 없다면 얼마나 버텨야 할지 과연 버틸 수 있을지를 학습해 나가지 않는가? 얼마나 버텨야할지 과연 버틸 수 있을지조차 명확하지 않다면 그 고통의 시간이 주는 새로운 시각 혹은 그 고통을 버티는 것 자체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가? 인간은 과연 희망없이 살아내어 나가는 사르트르적 실존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가? 과거 한 철학교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천국이 없이는 나는 희망이 없다(Without the heaven, I have no hope).” 나는 인간이 모든 여정의 끝은 선하고 긍정적이며 결국 행복(eudaimonia)할 것이라는 소망없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악의 문제는 실용주의적으로 고려할 가치가 없으며 절대자의 적극적 허락을 신뢰할 수 밖에 없다. 다른 말로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두 선택지만이 존재한다: 전지전능전선의 존재를 부정하고 삶의 방향성의 올바름을 불확실성 속에서 스스로 보장해 나아가거나 불확실성을 넘어서 그 올바름을 보장해주는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거나. 만약 후자를 선택한다면 현재 고난을 목적성이 결여된 그저 고통만을 위한 무의미한 사건으로 판단하는 허무주의적 태도의 비합리성과 그러한 태도가 상정하는 선과 긍정, 행복의 기준이 절대적인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하지 않음은 과녁을 빗나가는 것(hamartia)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의 함께하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가 보시기에 좋은, 우리에게 가장 알맞은 결과를 도출해 내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그 과정 속의 모든 고난과 고통이 아무 의미 없고 순수하게 악하게 보여도 결국 가장 선하고 완벽한 결과를 위해 의도된 것이며, 그 모든 것이 협력하여 이뤄내는 선에 대한 판단은 우리 자신이 아닌 절대자의 몫이다.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정된 절대자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토대로 타인의 고난의 의미를 함부로 판단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선악에 대한 판단을 완전히 내려놓은 시점에서부터 타인이 겪는 고난이 거시적인 과정에서 과연 어떠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 조차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난을 겪는 자들에게 해줄 수 있고 해줘야 하는 유일한 것은 진심어린 공감과 도움의 손길이다: 우리는 공감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노력해야 한다. 타인과 자신의 고난에 대한 정당화는 우리가 아닌 하나님에게 있으며 이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한다. 사랑과 윤리, 공감은 명제화 될 수 없으며 실천 그 자체에 있다.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세계가 존재하는 모든 사실들의 집합이라고 한다면 생각은 이 세계의 그림이며 명제들의 집합인 언어는 생각의 표현이다.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의 세계는 다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 즉, 무엇이 맞다 틀리다, 좋다 나쁘다 등 도덕심리적 태도는 언어와 인지 밖에서 그 언어와 인지 구조를 구축하는 규범이다. 어떤 규범을 따르는가에 따라 세계를 그리는 (인지하는) 방법이 다르며 규범성은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일종의 인지구조의 백엔드(back-end)이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고난과 경사를 포함하여 형통한 과정의 한부분인지, 즉 해당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해석함에 세상의 기준(무신론적 규범)과 하나님의 기준(유신론적 규범) 중 어느 것을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세계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며, 어떤 태도(패러다임)를 지니느냐에 따라 관련 컨텐츠를 인지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쿤(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가 시사한 바가 있다면 패러다임(태도)의 전환, 즉 규범의 수용에 대해서는 일관된 알고리즘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신앙이 정초주의적(foundationalist)적이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2)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고자 하는 바램에는 다음과 같은 모순이 있다. 한편으로는 개인의 선택을 포함해 세상만사가 절대자의 의도대로 흘러갈 것이라는 결정론(determinism) 혹은 예정론(predestination)적 생각,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이 절대자의 의도대로 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비결정론(indeterminism)적 생각, 더 나아가 그 의도를 파악하면 미래를 예측해 대비할 수 있다는 자유론(libertarianism)적 생각이다. 이 모순을 파훼하는 법은 오직 인간의 의지만이 비결정론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신은 더이상 전지(全知)하지 않은 존재이다. 하나님의 뜻을 내 욕심에 맞추기 위해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바램의 의도가 내 자신의 평안과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 대비함이라면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 즉 하나님의 전선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에게 폭군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며 그의 주권이 정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의사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바램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이같은 질문에는 현재 고난이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가졌는가 그리고 그에 따른 고통에 어떤 대응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물음 또한 있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든다: 과연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올바름과 우리의 관계는 무엇인가?
클리포드(Clifford)와 제임스(James)는 믿음이 과연 실증적(evidential)적인 것인지 실용적(pragmatic)인 것인지 논쟁했다. 클리포드는 오직 증거에 의거한 믿음만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제임스는 어떠한 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증거가 없어도 실용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믿음(belief)이라는 심리상태는 본질적으로 진실에 대한 전념(commitment)이다. 믿음의 정당성에서 실증성은 항상 우선권을 가진다. 하지만 매우 많은 때에 우리는 충분한 증거가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 확신(confidence)을 갖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만약 이 불확실성을 내포한 확신 또한 믿음의 한 종류라고 한다면 증거를 충분히 모으지 못할 수 밖에 없는 대부분의 현실 상황 속에서 내리는 결정 또한 특정 조건만 충족한다면 합리적일 수 있다. 다른 말로 믿음은 확률적인 것이다. 다만 믿음이 단순히 실용적일 수만은 없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밖에 비가 오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음에도 누군가 내게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100을 주겠다 한다면 명확한 증거를 무시하고 비가 오지 않는다고 진심으로 여기는 것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믿음은 일차적으로 증거에 기반해 있으며 여러 상황적 이유로 증거가 불충분하다면 여러 대체 추론을 통해 높은 확률 순으로 믿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것이다. 다른 말로 증거를 토대로 한 확신부터 확률을 토대로한 확신까지 포괄적으로 ‘믿음’으로 치부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개념을 가장 직관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일차적인 믿음을 좁은 의미에서의 믿음인 인식론적 믿음(doxa)이라 한다면 이차적인 믿음까지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의 믿음은 행정적 믿음, 즉 신뢰(fide)라고 볼 수 있겠다; 넓게 본다면 인식론적 믿음 또한 특정 현상을 ‘증거’로 신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신뢰에는 스펙트럼이 존재하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뢰의 기능을 분석해야 한다. 신뢰란 타인의 정보 전달을 수용(endorse)하는 것이다. 잠시 자연상태(state of nature)로 돌아가 보자. A라는 사람이 숲 속에 있다. 멀리서 수풀이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이 수풀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포식자일 수도 사냥감일 수도 그저 바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A가 서있는 곳에서는 수풀이 왜 흔들리는지 알 수 없다. A 옆에 높은 나무가 있으며 그 위에 B라는 사람이 앉아 있다. B의 위치에서는 수풀의 뒤에 무엇이 있는지 더 잘보일 것이다. B가 소리친다, “수풀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저 바람일 뿐이야. 굳이 겁먹고 다른 곳으로 도망가서 맹수를 마주칠 기회를 만들지마.” A에게는 단 두가지 선택지가 있다: B의 말을 신뢰하거나 신뢰하지 않거나. A가 B의 정보를 수용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에는 수많은 종류의 이차적 추론이 들어갈 것이다: 과거 B의 행적, 부족 안에서 B의 명성, 전에 높은 곳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봤던 기억 등. 하지만 그 무엇도 현재 B의 신뢰도에 대해 절대적인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자연상태에서 B에 대한 A의 입장은 우리가 평상적으로 믿음의 정초라고 여기는 모든 것에 적용된다: 경험, 오감, 측정기, 전문가, 계시 등. 꽤 의존할만한(reliable) 시각과 측정기도 이번만큼은 틀릴 수 있다. 틀릴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 하더라도 확률이 0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믿음의 실증적 정초의 신뢰성을 독립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입증’될 수 있다면 그 정초는 더이상 정초가 아니게 된다. 자기 정당성(self-justification)을 지닌 정초가 있다는 관념이 바로 셀라스(Sellars)가 비판한 ‘소여의 신화’(the Myth of the Given)이다; 자가 정당성은 미신이다. 정초주의(foundationalism)가 배제된 상황에서 믿음의 도약(leap of faith)의 합리성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은 해당 정보 수용의 정합성(coherence)이다. 하지만 정합성은 절대적 확신을 선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관된 진술조차 바탕은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차적 믿음, 즉 인식론적 믿음의 실증성은 정합성의 이상향을 제시한다. 다른 말로 신뢰의 최종 목표는 인식론적 믿음, 더욱이 참된 정당화된 믿음(JTB), 즉 지식(knowledge)이다. 그것이 다다를 수 없는 한계치라 하여도 이상적인 기준이 있어야 확률성이 성립한다. 우리가 관습적으로 정초라 여기는 것들은 바로 이상향을 향한 실증성의 역할을 일시적으로 수행한다. 다만 그 일시적 수행권은 자기 정당성이 아닌 합의(general consensus)에서 온다. 합의의 최소 단위는 개인이 아닌 집단이다. (집단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마을, 국가, 군대, 사교모임, 종교집단 등. 인간 문명 발생 이후 인식론적 면에서 아마 가장 완성도가 높은 합의 집단은 과학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신뢰’의 기능이란 합의를 통한 집단 구성원간의 협력을 통해 각 개인의 존속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믿음의 도약이란 바로 어떤 집단의 규범, 어떤 합의 규정을 따르는가에 대한 결정이다. 각 집단의 합의 규정에는 해당 집단의 가치관(성공 기준)이 묻어난다.
우리가 쫓아야 하는 것은 세상의 가치에 따른 성공 기준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기준인가? 어떤 가치관, 어떤 규범, 어떤 합의 규정, 어떤 가이드라인이 과연 도생의 길인가? 이에 대해 내리는 답에 따라 매순간 내리게 될 선택이 다를 것이다. 모든 선택은 결국 개인 및 집단의 평안과 안녕, 생존과 번영을 위한 것이다. 세상은 그 성공 기준을 얼마나 실리를 창출해 내었는가에 둔다. 이를 측정하는 단위는 이익, 즉 자본(capital)이다. 만약 세상의 기준을 따른다면 우리의 선택은 매순간 자본창출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모든 고난의 의미는 결국 얼마나 많은 이익을 내었는가, 즉 모든 자극에 대한 학습 지침은 이익에 대한 보상회로(reward circuit) 강화로 환원된다. 자본 혹은 재산은 절대자의 부재 중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가장 의존할 만한 차선책이다. 부의 축적, 즉 보상의 연속은 경험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유시장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본 제품 및 서비스, 즉 삶의 양식이 바로 가장 많은 합의, 즉 협력을 이끌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은 존속의 대용물(proxy)이다. 세상의 가치를 따른다는 것, 마몬(Mammon)의 주권하에 산다는 것은 자본창출을 극대화하는 보상회로 강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절대자를 대신하는 것이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이유(마6:24)는 세상, 즉 재물의 삶이 하나님의 주권을 필연적으로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것은 일차적으로 미래에 대한 대비책의 신뢰성을 자본으로 측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이미 나타난 것들(부의 축적)을 통해 나타나지 않은 것들(올바른 방향)을 가늠하지 않고 모든 것이 협력하여 이뤄지는 선에 대한 판단권을 주님께 넘기는 것이다. 기복신앙, 즉 금송아지 숭배(출32)는 절대 섞일 수 없는 두 기준을 하나님의 기준을 세상의 기준으로 환원하는 방향으로 섞으려 함이다. 그 내면에는 위에 말한 논리적 모순이 깔려있다. 기복신앙은 이러한 비합리성을 자신의 안위를 위해 고집하는 정신이다. 이런 면에서 볼때 모순투성이인 기복신앙이 나름 일관적인 무신론적 세계관보다 더 악한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란 무엇인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며 결국 선한 결말로 이끌어낼 하나님에게 ‘무엇인가를 구한다’라는 개념이 과연 성립될 수 있는가? 기도란 대화이다. 대화란 대화 상대를 같은 언어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기는 것, 상대의 행동과 발언을 단순한 잡음이 아닌 의도성을 지닌 행위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서로를 규범적 책임과 권리의 이행인, 즉 도덕적 행위자(moral agent)로 여기는 것이며, 서로를 이와 같이 여긴다는 것은 P. F. 스트로슨(Strawson)이 밝혔듯이 서로간의 반응적 태도(reactive attitude)를 통해 서로를 대인관계를 맺을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책임 물음과 권리 요구, 이에 상응하는 반응적 태도의 정서적 교류는 주장(claim)에 대한 확약(commitment)과 권한(entitlement)의 네트워크로 이뤄진 셀라스가 말한 ‘이성의 논리적 공간’(logical space of reasons)안에서 행해진다. 따라서 기도란 하나님과 우리를 같은 논리적 공간에 놓는, 그 안에서 대인 관계를 맺는 의식이다. 이 같은 의식 혹은 관례의 의도는 결과에 대한 주권을 하나님께 맡길 수는 있지만 이에 따른 인간적인 불안감을 표현하는 장을 여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표현 및 언어 활동을 통해 우리가 단순히 사물로서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서 절대자의 권한(authority)을 인정하는 개체로 승격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의 거룩하심과 식탁에 ‘참여’(metalambano/metecho)하는 것의 본질이다(히12:10; 고전10:21).
“철학과 인간의 과학적 이미지”(Philosophy and the Scientific Image of Man)에서 셀라스는 세계의 기본 구성원을 인간과 인간에게 보여지는 현상으로 보는 현시적 이미지(manifest image)와 기본 구성원을 사물(object)로 보는 과학적 이미지(scientific image)를 구분한다. 인간은 의도를 지닌 이성적 행위자(rational agent)로 이를 구성원으로 삼는 현시적 이미지는 규범으로 이뤄져 있다. 이에 반해 과학적 이미지를 이루고 있는 사물과 사물간 상호 작용은 규범의 대상이 아닌 설명의 대상이며 이는 분자단위의 ‘지각될 수 없는 개체들의 상정’(postulation of imperceptible entities)을 통해 설명된다. 즉, 과학적 이미지는 원자론(atomism)을 상정하고 있으며 이를 전제로 한 명제적 묘사 (즉, 논리-철학 논고에서 말하는 언어) 안에서는 기본적으로 전체론(holism)을 기반으로 하는 대인 관계가 불가능하다. 현시적 이미지가 결여된 과학적 이미지, 원자론적 세계관만으로는 유아론(solipsism)을 피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점이 아마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를 쓰게 된 계기일듯 싶다. (주석: 셀라스는 현대물리학을 기반으로 전체론적인 과학적 이미지의 가능성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능주의적 전체론으로 수축된 관계성이다. 애초에 규범성이 완전히 배제된 기능주의적 이해가 가능한지 자체가 의문이다.) 윤리의 기본 단위는 관계이다. 이 관계 안에서 주위 환경은 단순 사물이 아닌 행동 유동성(affordance)으로 존재한다. 그림으로서의 언어가 아닌 게임으로서의 언어 안에는 모든 것이 관계를 맺고 있고 그 관계는 옳고 그름(correct and incorrect)으로 이뤄져 있다. 바로 이 게임으로서의 언어가 현시적 이미지, 즉 논리의 이성적 공간, 그림으로서의 언어 밖에 있는 침묵(실천)의 공간이다.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바로 이 공간 안에서 이뤄진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전체론적인 세계관이 원자론적인 세계관 보다 실존적 우선권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실존적 자아(self)와 정서를 긍정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결국 자아 부정을 통해 열반에 이르는 불교의 구원 메카니즘과 궤를 달리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기도를 통한 끊임없는 정서적 교류를 통해 (타락한, 즉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본주의적 규범을 따르는) 자아가 점차 새롭게 되어 (혹은 실존적 본질을 찾아가며) 성화(sanctification)와 변혁(transformation)을 거쳐 하나님과 닮아감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에 대한 약속(covenant)이다.
(3)
자유론적, 자본주의적 가치관으로 이뤄진 세계관은 ‘부의 축적’이라는 독자적인 도생의 가이드라인 혹은 성공 기준을 제시한다. 이 세계관 기준은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대한 물질주의적, 더욱 나아가 유아론적인 규범을 기반으로 한다. 바로 이 세계관이 마몬이며 바울이 말한 배(욕정)를 숭배하는 사상이다(빌3:19). 마치 르우벤 지파가 약속의 땅을 들어가지 않고 광야에 정착했듯이(민32) 영생에 대한 신의 약속을 보이는 현실에 대한 자본주의적 해석을 기반으로 기복신앙을 행하는 것이 금송아지 숭배이다. 생존(survival)이란 본질적으로 자원에 대한 경쟁이다. 경쟁에서 이긴 개체는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을 받는다. 생존한 개체의 특성은 축적된다. 이는 경험치, 행동양식의 축적으로 이어지며 자본(부)으로 측정된다. 이 같은 도생 시스템은 일종의 굴레(wheel)로서 재귀(recursion)하며 추론적 문법(syntax)을 제시한다. 즉, 나름의 이성적 공간, 나름의 언어게임의 장이라는 것이다. 경쟁이라는 게임은 본질적으로 ‘비교’이다, 생존한 집단과 도태된 집단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우위를 점하는 자와 그러지 못한 자 사이의 계층의 계급화는 자본주의에 필수적 조건이다. 니체는 이러한 가치관의 본질을 ‘권력 의지’(will to power)로 이해해 이 의지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귀족(지배계층)과 노예(피지배계층)로 나뉜다고 보았다. 이 이지를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모든 것을 초월한 자를 위버멘쉬(Ubermensch)라 칭함은 무신론적 가치관의 세계관에서의 구원은 결국 유아론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도태는 고통의 원인이다. 즉, 모든 것을 색(色)으로 다루는 자본의 시스템은 고통의 연속이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즉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개인은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뤄야 한다. 사냥감을 얻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노동을 감행해야 한다. 등가교환(等價交換)은 때로는 노동을 통한 생산, 때로는 그 노동력에 상응하는 가치를 가진 재물을 통화로 자연 및 타인과의 거래로 이뤄진다.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는 약조, 이것이 자본주의 규범의 필수요소 중 하나인 계약(contract)의 본질이다. 계약은 자본주의의 논리적 공간에서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기준을 마련해준다. 그리고 이 계약 규범의 통치는 도태에 대한 두려움, 즉 비교를 통해 이행된다. 즉, 자본론은 죽음에 의한 통치이다. 우리는 항상 도태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 하며 이를 피하고자 자연선택을 받기 위해 전지전능전선의 부재로 인한 불확실성 안에서 거래를 맺는다. 우리가 거래를 통해 이어 나가려는 것, 자본을 통해 지키고 스스로 구원하고자 하는 것, 모든 가치의 핵심에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배부름, 더욱 나아가 우리가 ‘배부름’이라고 판단하는 기준, 즉 전지전능전선을 배제한 세계에서의 선악의 기준(창3)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육신을 다스리는 ‘죄와 사망의 법’이다(롬8). (주석: 스스로 선악의 기준을 판단한다는 것은 판단을 내리는 자신에게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에스겔 27-28장에서 두로(Tyre)의 왕이 신을 대적한, 혹은 신과 대등하려 했던 존재의 예표로 들은 것은 아마 두로가 교역을 통해 쌓은 부로 영향력을 행사했고, 상업의 중심에는 바로 자본주의의 핵심인 계약 관계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계약은 언약을 대신하는 구원에 대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적 세계관, 자본주의 시스템, 계약 존속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보상 제도이다. 보상 제도는 보상 심리를 통해 생물학적 자극-반응(S-R) 학습을 훈련시켜 규범을 따르게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보상을 통한 도생, 즉 경쟁은 자원의 희소성(scarcity)를 상정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희소성이 타인을 경쟁의 대상으로 치부하게 하는 요인이다. 경쟁으로 생존이 가능하려면 진실(truth)은 보편적이지 않아야 한다. 원어적으로 진실 혹은 진리(aletheia)란 가려지지 않은 상태(a-letheia)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인식론적 믿음(doxa)의 명제 내용이 사실(fact)과 부합하는 것을 가리킨다. 과연 수풀 뒤에 숨은 것이 피식자일지 포식자일지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이 생존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만약 A와 B가 희소성이 있는 자본(사냥감)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라면 B에게는 사실이 가려진 상태, 즉 거짓이 보여지는 것이 A의 생존에 유리하다. 결국 경쟁이란 자신은 추론을 통해 진실을 밝혀야하는 반면 타인은 끊임없이 속여야하는 게임인 것이다. 이는 계약을 통한 타인과의 협력 관계가 게임이론적으로 얼마나 불안정한 상태인지, 협력이란 본질적으로 휴전에 불과한지를 보여준다. 이에 반해 기독교의 제도는 은사(gift)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따르면 은사의 목적은 결국 사랑을 실천하기 위함이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 타인을 자신과 같이 여긴다는 것(마22:39) 그리고 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율법(규범)임이 기독교의 핵심이며, 이러한 도생 시스템을 가동하는 것이 은사로서의 보상이다. 계약으로서의 보상과 다른 점은 은사는 상응하는 가치의 이익을 얻기 위한 노동이 아닌 (자신에게 그러하듯) 그저 아낌없이 주는 행위이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공의이며, 이 같은 공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가 빌라도에게 선언한 주권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이 공의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진리의 보편성이 필수요소임으로 예수는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한다고 선포했던 것이다(요18:37). 진리가 보편화가 되어야 모두를 평등하게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4)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경륜”(엡3:9)이란 무엇인가? ‘경륜’의 원어는 행정, 관리 등을 뜻하는 ‘oikonomia’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경제(economy)의 어원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의 최종 목표는 ‘새예루살렘’이라는 정치적 공동체의 건설 혹은 당도이다(계21-22). 이는 플라톤의 공화국(The Republic)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과 같이 ‘정치’를 인간사의 완성으로 본 견해와 일맥상통한다. 정치경제는 기본적으로 자원 혹은 부(에 대한 권리와 책임)를 (재)분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약의 완성 또한 자원의 분배이다. 자본주의로 완성되는 세속적 세계관의 정경체계는 재분배를 경쟁의 논리에 따라 이행한다. 이는 세속은 기본적으로 자원의 희소성, 즉 생명의 유한함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반해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는 영생, 즉 무한함을 약속한다(요3:16). 신이 주도하는 세상에는 자원에 대한 경쟁이 없다. 그러므로 비교 또한 없다. 따라서 각 인격체를 그 존재 그대로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무한한 자원을 (재)분배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자원의 분배는 바로 영생을 인간에게 분배하는 것이다. 영생이란 무엇인가? 전지전능전선성을 띈 신의 본질, 즉 신성한 생명이다. 즉, 영생을 분배함은 신의 본질 그 자체를 인간에게 부여하는 것이다(창2:7; 요20:22; 고전15:45). 이를 통해 인간은 신성화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인간이 신의 본질을 받아 신성화됨이 결코 인간이 신화사상(神化思想)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화사상은 개인이 신격(godhead)을 취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개인의 독립적인 판단 기준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독단주의의 한 부류이며 수많은 사이비 종교의 원천 사상이다. 인간은 하나의 독립적인 개체로서는 절대 신성한 권능을 행사할 수 없다. 이것은 기독교와 세속주의의 공통된 전제이다. 신성한 생명, 즉 영생을 분배 받는다는 것은 실천적으로는 자신의 판단 기준을 내려놓는 것이다. 유한한 현실을 인정하지만 그 현실을 뛰어넘는 절대자의 권능(율법)의 효능을 인정하는 것이다. 역사의 흐름을 통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이루는 ‘선’에 대한 기준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다. 이는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규범, 생각의 틀, 즉 윤리관에 대한 인간의 한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자가 정당성을 가진 정초, 절대적 가치를 스스로 매듭지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증적 사고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실제(reality)와 생각(thought) 사이에는 원칙적으로 메울 수 없는 공백이 있으며 전지전능전선한 절대자의 성품(disposition)을 이상(ideal)적인 덕(virtue)으로 삼아 겸손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즉, 인간의 인지 능력(cognitive ability)의 디폴트 값은 불확실성이라는 것은 깨닫는 것이다. (회개와 속죄는 이러한 깨달음을 얻고 숙지하는 과정으로, 신의 죽음(the death of God), 즉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목격 혹은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 과정—속세주의와 신화주의적 윤리관을 깨치는 과정—의 개시라고 볼 수 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교통(fellowship)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신의 본질로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본성이 신과 존재론적으로 호환성을 이룬다는 것이다. 육신의 세계는 자원의 희소성으로 이뤄져 있다. 그렇다면 영원으로 이뤄져 있는 세계의 일부분이 되기 위해서는 이에 합당한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기도란 바로 그러한 존재성을 실천하는 의식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대화란 같은 언어 공동체, 즉 같은 이성의 논리적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며, 그렇다는 것은 서로의 행동과 발언에 의도성과 의미, 즉 합리성을 부여하여 인격을 인정하고 대인 관계 상대로 보는 것이다. 바로 이 공간 안에서 ‘인간’(도덕적 행위자)으로서 정체성이 확립이 되고 권리를 인정받는 것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같은 규범을 따른다는 것이며, 이는 같은 관점, 같은 세계를 산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영생의 규범, 하나님의 논리적 공간에 참여하는 것이다. 기도(대화)를 통해 표현된 희로애락 속에 발견된 자신만의 기준을 내려놓고 새롭게 분배될 성품을 위해 자신을 비워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 혹은 논리(logos)로 오신 이유이다(요1:1). 실제가 아닌 현상(appearance), 즉 색(色)으로 가득찬 자아를 비워내는 과정, 자본이 아닌 영생을 열망하는 과정—진리의 보편이 아닌 거짓과 은폐, (자기)기만이 성행하는 자연상태를 떠나 합의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사회구성원이 되어가는 과정—즉, 약속의 땅을 향해 애굽을 떠나 광야를 떠도는 과정을 지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고난의 길(벧4)을 걷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교통(기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분배와 권리, 지위 등의 정치경제적, 규범적(deontic) 신분은 집단 내 합의, 즉 공동체 단위 안에서 실제성을 갖고 행해진다. 앞서 말했듯이 그 집단이 국가일 수도 있고 사교모임일 수도 있다. 신성 분배의 공동체는 교회이다. 이는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지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특정 교파나 기관이 아닌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교회(ekklesia)이다.) 무리를 벗어난 개인적인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은 오직 교회(즉, 믿는 자들의 집단)를 통해 (재)분배된다. 이는 오직 교통(논의)을 통해 독단주의 등 잘못된 사상을 논리적으로 견제하고 규범을 시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리는 관계 속에 있는 것이며 신앙은 공동체 전반에 흩어져 퍼져 있는 것이다. 즉, 신앙과 구원과 기도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 아닌 단체(교회)이다.
마지막으로 방언이란 무엇인가? 방언은 황홀경에 빠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를 담당하는 뇌의 일부분이 트랜스 상태에 빠지면서 오작동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방언, 즉 신의 언어란 바로 교회 안에서 서로의 교통(기도)에 참여하여 ‘교회’라는 언어 공동체의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영(spirit)이라는 것은 규범 행정의 실체이다. 성령(Holy Spirit)의 충만함을 받아 방언을 한다는 것(행2)은 하나님의 논리적 공간을 구성하는 규범이 ‘레마’(Rhema)로 다가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창1:31) 형태의 세계의 그림을 그리는 행위이다. 이는 세속적인 자본주의적 세계관이 아닌 영생을 약속한 언약의 관점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관점 속에서 바라본 모든 것이 협력하여 이룬 ‘선’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도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창5:24; 미6:8; 마28:20)하며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며(여1:7-9) 자아를 비워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의 흐름에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영역, 바라는 것들과 보지 못하는 것들(히11:1), 언어 밖 침묵의 공간, 즉 증거궤가 위치한 지성소(Holy of Holies) 안에 거하는 모든 것들이다. 그 안에는 모든 논리의 정초인 자기동일성(self-identity)의 실체이신 여호와(YHWH)가 계신다. 모든 소여(given)는 신화(myth)이다. 기독교는 생명의 신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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