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11 노트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거기에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 (겔 8:14)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틀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출 32:3-6)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 4:3)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 3:19)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 20:3)


에스겔서에서는 죄를 지어 주변 국가에게 잔인하게 정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예언된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우상숭배이다(겔 6-9).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우상을 섬겼는지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에스겔 8장 14절이다. 여기서 여인들이 ‘담무스(Tammuz)’를 위하여 애곡하고 있다고 묘사된다. 담무스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양치기와 농경의 신으로 풍요를 상징한다. 따라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주된 우상숭배 대상 중 하나는 풍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반복적으로 풍요, 재물 등 물질주의적인 요소에 대한 우상숭배를 경고한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는 재물이 ‘마몬(Mammon)’이라는 개체로 신격화되어 하나님과 대치된다. 또한 마태복음 19장과 마가복음 10장에서는 각각 부와 하나님의 길이 서로 상반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성경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이다. 여러 형태의 언약이 있지만 핵심은 인간이 신의 말씀을 따르면 신은 인간을 보호해 준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이 언약의 결정체인 ‘십계명’의 첫번째 계명이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것이다(출 20:3). 고대인들에게 종교란 단순히 신조나 심적 안정을 넘어서 국가 정치 체제 그 자체였다. 특정 신을 모시고 율법을 따른다는 것은 사회를 구성하고 공동체 의식을 부여하는 이데올로기였다. 따라서 우상숭배란 국가의 근간이 되는 일종의 ‘헌법’에 대한 불복종이었다. 국가와 법, 정의 등 법률 및 윤리 개념의 기능은 무엇인가? 이 같은 개념은 타인과의 공통분모를 형성하여 합의와 협력을 가능케하여 집단 구성원의 생존과 번영을 도모하는 것에 의의가 있다. 그러므로 특정 신을 섬긴다는 것은 특정 가치관 위에 세워진 정치, 경제 체제를 통해 특정한 형태의 생존과 번영을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의 성경에서 말하는 생존과 번영은 ‘성화’를 통해 신의 본성으로 채워져 ‘새 예루살렘’이라는 국가의 시민이 되어 죽음을 이기는 것이다(요 3:6; 롬 8:2; 빌 3:20; 계 21:1-7). 하지만 성화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늘의 음식 ‘만나(manna)’를 섭취해야 한다(출 16:11-30; 요 6:31-35; 계 2:17). 신약시대의 ‘만나’는 예수 그 자신이며(요 6:35), 예수는 신의 말씀 혹은 논리(logos) 그 자체이다(요 1:1). 그러므로 기독교인에게 생존과 번영이란 예수을 받아들여 영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다(창 2:7; 요 20:22; 고전 15:45). 이에 반해 재물을 섬기고 땅의 소산(창 4:3), 즉 각자의 노력을 통해 부를 쌓아 풍요를 이룬다는 것은 여호와의 헌법(율법)이 아닌 스스로의 정치, 경제 체계를 통해 도생하려 함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개인의 한계 밖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롬 8:28) 기독교의 의존적 세계관이 아닌 선악과를 취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창 3:5, 22) 직시된 현실에서 불안을 해소하고자 하는 독립적 세계관, 즉 바벨탑을 쌓으려는 의지이다(창 11:1-9). 에베소서와 디모데전서에서 사도바울은 ‘경륜’으로 번역되는 ‘oikonomia’ (οἰκονομία)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거주지’를 뜻하는 ‘oikos’라는 단어와 ‘분배’를 뜻하는 ‘nemo’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경제’로도 번역된다. 앞서 말한 서신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경제’가 있음을 명시한다. 즉, 성경에는 새 예루살렘으로 이뤄지는 하나님만의 고유한 분배 체계인 정경(政經) 구조 및 법률이 있다. 모든 선한 법의 의도가 그러하듯이 하늘의 법도 또한 민생과 동떨어져 단순히 통제하려는 것이 아닌 집단 구성원의 생존에 유리한 행동 양식을 성문화한 것이다. 예를 들어 레위기와 신명기에서 돼지고기를 금한 것에는 당시 이스라엘인들이 떠돌던 사막 기후가 돼지 목축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왜냐하면 돼지는 인간과 식량이 겹치며, 돼지 목축에는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기 이외에도 여러 쓰임새가 있었던 소나 양과는 달리, 당시 돼지에서 얻을 수 있던 생산물은 고기와 기름 정도였을 것이며 이는 나쁜 가성비를 넘어 자원결핍을 유발해 집단 불화를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같이 율법은 특정 가치관을 내세워 특정 형태의 생존 및 번영을 도모하는 수단이었다. 여호와가 부의 분배, 생존의 방식을 보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호와(YHWH)’라는 존재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즉 영생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출 3:14; 요 3:16). 하지만 성경의 역사 기록에서 볼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은 영생 그 자체와의 교통이 아닌 풍요와 안녕 등 영생의 부산물에만 눈이 멀어 반복적으로 생명의 본질이 아닌 결과물만을 추구하고 갈망하게 된 것이다. 필멸자로서 스스로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회개와 겸손을 통해 신성을 경외하고 붙들어 성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지금 현재 자신의 행복과 쾌락, 현상유지를 제 1가치로 두고 재물 및 자본을 통해 미래를 대비하고 제어하려는 의지 자체가 여호와가 보기에는 과연 ‘가증한 일’(겔 8:13)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담무스든 금송아지든 봉건주의든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생산 수단에 대한 권리를 나름 분배하여 영생의 보호 밖에서 부를 쌓고 그것을 천막 삼아 광야에서 하루라도 더 버텨보려는 분투이자 우상숭배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금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부르며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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