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 철학) 무술의 실전성
전통 무술의 실전성을 따지기 앞서 먼저 ‘실전’을 정의해야 한다. 생각보다 ‘실전’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단순하게 현재 MMA 룰이 실전에 가장 가깝지 않겠는가 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는 약 8할이 맞는 말, 2할이 틀린 말인 듯하다. MMA가 타 종목의 무술, 격투기 시합에 비해 포괄적인 경기 형태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옥타곤이라는 특정 환경과 더불어 생명에 위협이 되는 급소 가격(낭심, 후두부 등), 무기술 등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엄연히 ‘룰’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옥타곤이라는 환경은 맨땅과 달리 넘어졌을 때 몸에 전달되는 충격을 흡수할 뿐만 아니라 태클당한 후 그래플링 반격에 용이하며, 여러 사물과 장애물의 부재로 변수가 생략되도록 형성된 일관된 공간, 일종의 통제 환경(controlled environment)이다. 급소 가격과 무기술, 특정 기술(싸커킥, 스톰핑 등)이 배제된 환경 또한 변수를 줄이므로 이에 최적화된 격투술이 발전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와 같은 통제 환경을 여러 실제 상황들의 대략적인 공통분모로 여긴다면 MMA 룰에 의해 발전된 격투술이 여러 환경에 가장 응용성이 뛰어난 격투기 형태인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즉, 안전, 지속 가능성 등 여러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실제 상황’과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MMA 룰이라는 환경이 격투술이 특정 변수에 지나치게 최적화되어 범용성을 잃게되는 현상을 방지하여 적어도 맨손격투에 관해서는 가장 응용성, 효율성이 뛰어난 격투기 형태 발전을 촉진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는 우리가 ‘실전’ 혹은 ‘실제 상황’이라고 부를 만한 것에는 사실상 수천, 수만가지의 양식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며, 이에 따라 각 상황과 변수에 맞는 움직임을 모두 배우기 보다는 환경적 이상치(outlier)를 배제한 세팅에 적합한 기술을 배우는 것이 통계학적으로 범용성을 가질 확률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무기술 같은 경우는 애초에 타격술과 공방 논리가 다르기 때문에 두 가지를 병행 혹은 따로 훈련하는 방식이 효율적일 수 있다.
이와 같이 ‘실전’에 대한 직접적인 정의를 건너뛰고 MMA 룰을 실전의 프록시(proxy)로 이해한다 해도 ‘실전성’은 또 다른 문제이다. 무술의 실전성에는 단순히 특정 기술의 유용성 뿐만 아니라 기술 원리를 습득하는 훈련법, 훈련의 지속 가능성과 접근성 등의 문제 또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MMA 룰을 포함한 여러 상황 양식 안에서 레슬링 기술이 매우 위협적이긴하나 엘리트 체육 교육 중심인 레슬링을 일반인이 접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로 인해 옥타곤 상황을 마주할 일이 적은 일반인이 현실에서 레슬러를 마주칠 확률 또한 낮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 격투기를 습득하는 것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계산한다면 “실전성”이 좀 떨어진다 하여도 간단한 호신술을 알려주는 합기도 등을 습득하는 것이 넓은 의미에서는 더 높은 실전성을 보일 수도 있다. MMA 룰 자체에서 파생되는 특정 무술의 실전성 문제 또한 존재한다. 앞서 말했듯이 MMA는 타 종목에 비해 매우 포괄적인 경기 형태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사실상 타 종목 경기에 비해서는 상황적 변수가 많다. 이는 습득할 기술의 개수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만약 MMA의 실전성이 다양한 ‘실전’의 변수를 배제하고 상황을 간편화하여 얻게 되는 응용성과 범용성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같은 논리로 MMA보다 더 많은 변수를 배제한 타 종목의 격투술이 더 높은 실전성을 보인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논리가 비직관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물론 변수 제거율과 기술 개수가 반비례하는 것은 맞지만 변수 제거율과 기술 범용성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MMA가 타 종목에 비해 배워야 할 기술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MMA 룰로 얻게 되는 통제 환경이 타 종목에 비해 수많은 실제 상황의 공통분모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MMA에는 기술 습득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의 높은 것에서 오는 비효율성이 존재하지만 이를 극복한다면 얻게 되는 기술 개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타 종목에 비해 더 높은 실전성, 범용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훈련의 지속 가능성과 접근성, 비용 문제 등도 엄연한 실전성이다. 그저 ‘이론상’으로 실전성이 높은 것에 가치를 둔다면 앞서 말했듯이 MMA 룰로 간편화되기 전 모든 ‘실제 상황’을 습득하는 것이 가장 실전성이 높을 것이다. 그렇다면 MMA의 실전성을 보강하기 위해서는 훈련법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MMA와 달리 더 많은 변수를 배제한 타 종목 룰의 의의는 변수 제거율과 기술 개수의 반비례에서 온다. 즉, MMA보다 더 많은 변수를 제거한 상황을 상정한 특정 격투기, 무술 등은 필연적으로 특정 기술 세트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숙련도를 얻게 될 수밖에 없다. MMA라는 일종의 가상의 무술이 레슬링, 주짓수, 유도, 복싱, 무에타이, 태권도 등 각각 세분화된 무술에 비해서는 높은 범용성과 응용성을 보일 수는 있겠지만 수련자 개인의 눈높이에서 볼 때 세분화된 무술 훈련으로 얻게 되는 기술이 MMA 훈련을 통해 얻게 되는 기술의 숙련도보다 더 높을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 범용성의 높은 MMA라는 이상향을 이루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범용성이 낮은 각 세분화된 기술체계를 전문적으로 습득하여 융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각 개인의 역량과 투자력에 따라 습득하게 되는 기술체계의 종류와 양이 차이가 날 수 있다. 예를 들어, A라는 수련자는 복싱과 무에타이에 각각 4할, 주짓수에 2할을 투자하여 그래플링보다는 타격에 더 전문성을 보일 수 있으며 B라는 수련자는 태권도에 3할, 레슬링에 7할을 투자하여 킥에 유용한 장거리와 그래플링에서 강세를 보일 수 있다. 필자는 과연 어떠한 분할이 효율성, 범용성 등을 포함해 가장 실전성이 높은지에 대한 계산을 하기에는 MMA 룰조차도 변수가 많기 때문에 이는 통계학적으로 의미가 없으며, 그저 각 개인의 재능과 훈련 목적, 상대와의 상성 등과 함수 관계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실전성에 가장 알맞는 훈련법은 ‘MMA’라는 실전의 프록시를 이상향으로 두고 추구하되 납득할 수 있는 룰과 기술 체계, 훈련 기법, 교차 검증성을 지닌 전통 무술 및 전문화된 격투기를 배워가며 타 무술, 격투기 간 호환성과 융합성을 실험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MMA 룰이라는 것은 일종의 통제 환경임으로 임상적, 실증적 의의를 가졌지만 과학적 방법론이 그러하듯 실험의 결과가 100% 확증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실전성은 확률로만 말할 수 있고, 확률은 언제든지 우리의 예상을 뒤엎을 수 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을 예측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보기에 전통 무술 및 현대 창작 무술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태권도나 영춘권, 복싱과 같이 특정 환경 및 룰에 전문화된 기술 체계를 가진 무술, 쿠도와 실랏, 절권도와 같이 어느 정도 범용성을 추구하는 원시적인 형태의 MMA 체계를 가진 무술로 나뉜다. 실전성에 입각한 훈련법이 이 두 가지 종류를 대할 때는 다른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다. 전자는 일종의 스페셜리스트로 특정 기술 혹은 움직임의 원리를 습득할 때 참고하면 좋을 것이고, 후자는 세분화된 기술 체계를 습득한 후 타 무술을 융합하는 과정에서 MMA의 원시적인 형태로써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인간이 처할 수 있는 환경은 넓고 한 개인이 모든 것을 완전히 습득할 수 없기 때문에 ‘무술’이라는 클라우드 데이터가 존재하며 각 개인은 여러 경험과 교류, 상호작용을 통해 클라우드를 접속하며 개인의 가치관과 상황에 맞는 움직임의 형태를 다듬어 나가는 것이 무도인으로서의 삶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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